[1. 지우의 시점 – 카톡 알림]
밤 11시 38분. 침실의 공기는 에어컨 바람에도 불구하고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퇴근 후 샤워를 마친 지우는 얇은 면 잠옷 차림으로 침대에 반쯤 기대어 있었고, 무릎 위에 놓인 휴대폰이 갑자기 진동했다.
화면이 밝아지며 낯선 이름이 떠올랐다. 서준.
심장이 계단을 단숨에 뛰어오르듯 한 번 크게 요동치고, 다음 순간 가슴이 진공 속에 갇힌 듯 고요해졌다.
지우의 오른손 새끼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휴대폰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굳었다.
'누군가 장난을 치는 걸까? 아니면… 이런 우연이 정말 가능한 걸까?'
메시지 미리 보기 창에는 한 줄의 문장이 흰색 말풍선 안에 또렷하게 적혀 있었다.
"비 오는 날, 라떼… 기억하죠?"
지우는 10분 동안 그 메시지를 열지 못했다. 엄지손가락이 화면 위를 맴돌다 멈춰 섰다.
분명 카페 장면은 AI가 써낸 가상의 이야기였다.
그런데 화면 속 그 남자가 지금 현실에서 말을 걸고 있었다. 창가 자리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앉아있던 그 사람이.
[2. 과거 장면 – 지우의 회상]
어제 점심 무렵, 갑작스러운 소나기가 도심을 덮쳤다.
회색 재킷을 입은 지우의 어깨는 빗방울에 젖어 짙은 색으로 변해갔다.
서둘러 카페 문을 밀고 들어서는 순간, 시원한 공기와 함께 원두 향이 코끝을 스쳤다.
그때 창가 쪽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돌아본 순간, 흰 셔츠를 입은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썹이 미세하게 올라갔고, 입꼬리가 희미하게 움직였다. 정말 눈 깜 박할 사이였다.
지우는 당황스러워 시선을 피했지만, 오른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그 모습이 뇌리에 선명하게 남았다.
그날 오후 회의가 끝난 직후.
‘서준’이라는 이름으로 친구요청이 왔다. 프로필 사진을 보니 그 남자였다.
그로부터 하루가 지난 오늘 밤, 이렇게 첫 메시지를 보내온 것이다.
[3. 지우의 응답과 혼란]
지우의 왼손은 무의식적으로 목 뒤를 감쌌다.
오른손 검지는 화면 위에서 작은 원을 그리며 여전히 망설였다.
'네, 기억해요'라고 쓰면, 그건 마치 AI 소설 속 서준과 이어지는 대사의 다음 줄 같았다.
그렇다고 '누구세요?'라고 쓰면, 현재 마음에서 꿈틀거리는 이 묘한 설렘을 스스로 끊어버리는 결과를 불러올 것 같았다.
5분 후, 지우는 짧게 타이핑했다. 엔터를 누르기 직전,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지우: "네. 기억해요."
답장은 1분 만에 왔다. 화면에 '입력 중…' 표시가 사라지고 새로운 말풍선이 나타났다.
서준: "그때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어요. 그런데 오늘이 더 어울릴 것 같네요."
지우의 등줄기로 서늘한 기운이 흘렀다. 한 줄의 메시지 속에서, 소설 속 대사와 똑같은 리듬과 온도를 느꼈기 때문이다.
현실의 서준이 AI 속 서준의 말투를 그대로 이어가고 있었다. 문체까지, 쉼표 하나까지 닮아 있었다.
픽션과 현실의 경계가 완벽히 겹쳐진 순간, 모든 것이 불분명해졌다.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이 대화가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이, 어쩌면 모든 것의 섬뜩한 시작이었다.
밤공기가 순식간에 차가워졌고, 지우는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렸다.
하지만 오싹함은 피부가 아닌, 훨씬 더 깊은 곳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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